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더글러스 맥아더/평가 (문단 편집) ==== 개전 ~ 인천 상륙 작전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ncheonLandingMcArthur.jpg|width=100%]] || 맥아더 장군과 에드워드 M.알몬드 장군(오른쪽)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유엔군의 한국군 지원을 승인하는 결의안 82를 통과시켰다. 유엔은 미국정부가 지휘관을 선임하도록 권한을 부여했으며,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만장일치로 맥아더를 추천했다. 이로서 맥아더는 일본에서 USAFFE의 사령관을 지내는 동시에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여기에 모든 한국군도 그의 지휘하에 배치되었다. 맥아더는 전쟁 초기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지원 병력을 파병해 낙동강 방어선을 유지하며 전세를 역전시킬 묘책을 궁리했다. 그는 전황을 확실히 뒤집기 위해서는 적 후방에서 상륙하여 북한군을 협공으로 섬멸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가 정한 상륙지점은 인천이었다. 이에 워싱턴의 미 국방부와 합참본부는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 상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상륙이 쉬운 군산에 작전을 수행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군산에 상륙할 경우 적의 보급선을 절단하지 못하고 적의 병력을 포위하지 못 해 비효율적이니 [[인천상륙작전|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단숨에 공략함으로서 적의 보급선을 완벽하게 틀어막고 적을 협공해 섬멸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천에 성공적으로 상륙한 후 서울로 진군하여 9월 28일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후 서울을 장악한 군대와 낙동강 전선의 군대가 그 사이에 놓인 북한군을 협공해 사실상 괴멸시켰고 만여 명에 달하는 북한군은 갈 곳을 잃고 지리산에서 [[빨치산]]이 되었다. 이 성공으로 맥아더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고 누구도 맥아더를 감히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완전한 괴멸'에는 실패했다. 인천에 상륙한 부대는 다시 배를 타고 서해->남해->동해 뱃길로 원산에 다시 상륙했고, 인천 상륙군-원산 상륙군이 만났을 때는 (당연히) 잔존 북한군이 그 북쪽으로 빠져나간 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